노무현의 고백 ㅡ 『여보, 나좀 도와줘』 어록 모음
1.
"정부는 입만 열면 노사 화합을 외칩니다. 그러나 노조 한 번 해 보려고 하다가 전기도 끊기고 수도 물도 끊긴 공장 바닥에서 스티로폴 한 장 깔고 앉아서 생라면을 씹고 있는 이 노동자가, 가족이 가져다 준 주먹밥마저 빼앗겨서 불타 버리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이 노동자가, 그리고 끝내는 감옥 갔다가 해고되어서 길거리에 내쫓긴 이들 노동자가 그들을 내팽개친 기업주와 이 땅 위에서 서로 화합하고 살기를 기대하십니까?
국무위원 여러분, 아직도 경제 발전을 위해서, 케이크의 크기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겠습니다. 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이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란 말이야!"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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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글 잘썼다. 그냥 누구나 들어도 사이다 발언 같은 느낌이고, 설득력 호소력 만땅인 말이네..크.....
이 패턴에다가 자기가 원하는 사상만 주입해서 단어만 요리조리 바꾸면 진짜 설득 못할 게 없을 듯...
2.
- 시류에 순응한다는 것은 힘 있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간다는, 그러한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침묵)
- 그것은 단순히 현상 유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좀 더 성장하기 위해 힘 있는 사람에게 접근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까?
- 힘있는 사람에게 잘못 보이면 괴로운 일을 당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영합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 혹시 그 순응이 부정한 것이라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 능력에 맞게 내는 것은 부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일해가 막후 권부라는 것이 공공연히 거론되기 전에는 묵묵히 추종하다가, 그 권력이 퇴조하니까 거스르는 말을 하는 것은 시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닙니까?
-...(침묵)
- 왜 부정이 아니라면 진작 6.29 이전부터 바른말을 하지 못했습니까?
- 우리는 그러한 용기를 가지지 못한 것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 이렇게 순응하는 것이, 힘이 있을 때는 권력에 붙고 없을 때에는 권력과 멀리하는 것이,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가치관의 오도를 가져오게 하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다고 보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증인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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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야....
근데 사실 저 청문회 때는 힘을 가진 게 반대편이니까 반대편에 맞게 답을 해야 하네..ㅋㅋ
*6.29 : 6.29 민주화 선언. 노태우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다.
3.
여자들이 전화를 해 만나자는 전화도 있었다. 그중에서는 일방적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만나자는 적극적인 여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비서들이 중간에서 차단해 버렸다는 것이다. 차마 내색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은근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그런 전화가 오지 않을까 기다려지기도 하지만, 그런 전화가 다시는 오지 않는 걸 보면 청문회의 영광은 역시 한때의 옛이야기였나 보다. 그럴수록 그때의 비서들이 얄밉기만 하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32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노무현 전 대통령이 1946년 9.1 생이니까 1993년이면 한국 나이로 48살 정도 된 것 같다.
4.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
YS의 이 말은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건강을 중요시하는 말처럼 들린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아침 조깅으로 단련된 건강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건강은 빌릴 수 없지만, 머리는 빌릴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의 순서를 앞뒤로 바꿔 놓으면, YS의 사람 관리 능력과 용병술에 대한 자신감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YS의 사람 챙기기, 그리고 인맥 관리 능력은 정말 출중하다고들 한다. 나 스스로도 YS를 '뛰어난 보스'로 평가하는 데는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83
노무현 전 대통령의 통찰력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단어 위치만 바뀌었는데도 뉘앙스가 저리 달라지는 걸 딱! 캐치해 내다니...
*YS : 김영삼 의 약자.
5.
특히 남보다 앞서 생각하고 남을 다스려야 할 입장에 있는 지도자라면, 상당히 '체계화된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정도의 철학을 갖추려면 이미 정치·경제·사회·문화·과학 등 다방면에 걸쳐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철학'이 없는 정치인은 '두목'이라는 말은 들을 수 있어도 '지도자'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86
크....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예술입니다. 두목과 지도자의 교묘한 차이를 딱 확장시켜서 YS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6.
나는 훌륭한 정치 지도자의 3대 요건으로 '권력 장악 능력', '살림살이 솜씨', 그리고 '역사의식'을 꼽는다. 그러면 이 기준으로 볼 때, YS는 어느 정도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먼저 YS는 '권력 장악 능력'이라는 측면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다. 그것도 '3당 합당'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신무기를 개발하여 집권에 성공했다.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 대통령처럼 총을 들고 나온 것도 아니고, 또 자기 스스로 주장해 왔듯이 국민의 지지로 정권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선거를 거치긴 했지만, 그건 '3당 합당'에 비하면 오히려 결정적인 과정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히 독창적이라 할 수 있는, 권력 장악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는 많은 무리도 있었고 또 적지 않은 억지도 있었다. 한 마디로 숱한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YS는 숨 막히는 권력 싸움에서 승리했고 대권 장악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지도자로 부르는데 아직 동의를 할 수 없다. 그로 말미암아 청산해야 할 이 땅의 기회주의가 다시 때를 만났기 때문이다.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즉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YS가 3당 합당으로 권력을 잡기 전만 해도 이 땅에서는 기회주의자들이 차지할 수 있는 장물의 수준은 한정되어 있었다. 고작해야 권력에 빌붙어 먹고사는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YS의 대권 장악과 함께 기회주의자들의 입지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기회주의자들의 성공이 최고 권력의 차원으로까지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YS의 대권 장악은 기회주의자들에게는 하나의 신선한 모델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스러기나 먹는 기회주의가 아니라 통째로 먹는 기회주의, 즉 기회주의의 극치가 실현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이 옳을 것이라고 가르쳐야 할 것인가. 정의니 가치니 하는 말들은 이제 국민의 냉소 거리에 지나지 않고, 소신과 지조를 얘기하던 사람들에게는 무력한 허탈감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중략)
아무튼 지금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돌고 있다.
그나마 YS의 살림살이 솜씨라도 좋아야 할 텐데··········.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86-88
노무현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에 대한 엄청난 분노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굉장히 화가 났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시절, 권력 장악 능력이 굉장히 떨어졌었다. 뭐.. 그 덕에 권위주의 탈피라는 칭송을 받고는 있지만..ㅋㅋ
7.
제(齊) 나라의 장공(莊公)이 사냥을 나갔을 때, 한 마리의 벌레가 다리를 쳐들고는 수레의 바퀴를 향해서 왔다. 장공이 마부에게 "저게 무슨 벌레냐?"하고 묻자, 마부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놈은 사마귀라는 이름의 벌레이옵니다. 저놈은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았지 뒤로 물러설 줄은 모릅니다. 제 힘은 생각지도 않고 적을 가볍게 여기는 그런 놈입니다."
그러자 장공은 이렇게 말했다.
"이 벌레가 만일 사람이라면, 반드시 천하에서 날랜 사나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는 수레를 돌려 그 벌레를 피해서 가도록 했다.
이는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고사 성어의 유래이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당랑 즉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는다는 뜻으로, 흔히 제 분수도 모르고 강자에게 반항하는 것을 빗댈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가 DJ와의 인연을 생각할 때마다 이 '당랑거철'이라는 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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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잘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다. ㅋㅋ
암튼 당랑거철 이란 이야기는 참 멋있는 듯.
저거하고 약간 화법이 비슷한 이야기도 하나 올려보겠습니다. ㅎㅎ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크.... 뭐 내용은 별다를 게 없지만 문학적 표현들 하나하나가 소름 끼치는 표현방식들입니다. ㄷㄷ (기이하게, 나지막하게, 어느 깊은 가을밤...)
8.
대통령 후보를 선출할 전당대회를 바로 앞둔 그 시점에서 나는 의원 회관으로 DJ를 찾아갔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상관없이 무조건 당권을 포기한다는 약속을 해 주십시오."
이때에도 DJ도 침묵하지만은 않았다.
"노 의원,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오."
그러나 그 이후 우리의 요구는 관철되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당돌하고 야박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내 나름대로는 있었다. 당시 총선에서 전멸해 버린 영남 지역의 지구당 위원장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안심시켜 주자는 것이었다. 그래야 그들이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목적이 어쨌든 간에 그분에게 미안했던 마음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일은 DJ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고 정계에서 은퇴한 마당에 더욱 두고두고 내 마음의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04
*관철(꿸貫뚫을徹) : 어려움을 뚫고 나아가 목적을 기어이 이룸.
*DJ : 김대중 의 약자.
노 전 대통령이 하는 말은 음성 지원되는 느낌.. ㅋㅋ 진짜로 당랑거철이네.
9.
대통령 선거가 의외의 큰 표 차이를 내면서 패배로 끝난 바로 다음 날 아침, DJ는 "국민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하나도 갚지 못하고······"라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는 홀연히 정계를 떠났다.
수십 년에 달하는 가시밭길 정치 역정이 마감되는 순간이었고, 많은 지지자들과 국민들의 마음속에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남겨 준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나 역시 그 장면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그로부터 거의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지금까지도 'DJ가 정말 은퇴한 것이냐?', '혹 다시 복귀하는 게 아니냐?'를 둘러싸고 설왕설래가 그치지 않는다.
신문, 방송이야 남의 말하기 좋아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당내 정치인들조차 그분의 복귀를 믿거나 지금도 그분이 정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DJ를 직접 만나본 결과는 간단했다. 나는 그분의 은퇴 이후 네 번을 만났는데, 그 결과 내가 얻은 결론은 DJ가 진짜로 정계에 복귀할 뜻도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05
하지만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약자)는 1998년, 대통령이 되게 된다..? ㅋㅋ
완전 헛다리!!
10.
DJ는 지난 대통령 선거를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함으로써, 존경받는 훌륭한 지도자의 세계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 후의 모습들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이미지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부닥칠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이 틀림없으며, 또 그런 과정에서 DJ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여할 일도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지금의 DJ는 그 이미지의 세계, 존경받는 지도자의 세계에서 이 현실 정치판이라는 세계로 돌아오면 안 된다. 그 길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다리를 넘어오려고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존경받는 지도자의 이미지는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한국 정치는 영원히 도덕적 신뢰를 회복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09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치겠네 증말 ㅋㅋㅋㅋㅋㅋ
김칫국 다 마셔놓았었구먼요 ㅋㅋㅋㅋㅋ
11.
처음에는 서로 책을 빌려 주고받고 하다가 나중에는 자주 만나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오랫동안 시치미를 뚝 떼고 딴청을 부렸다. 거의 1년간을 그렇게 나의 애를 먹인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열었다.
처음 그렇게 힘이 들 때는 아내의 콧대를 원망했으나,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오히려 일이 안 풀렸던 것 같다. 아내를 처음 몇 번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결혼해 달라고 졸라댔으니, 일이 잘될 턱이 없었다. 지금 다시 아내와 연애하라면, 결혼 따위의 말은 입밖에도 내지 않고 오히려 아내 쪽에서 결혼하자고 조르도록 할 수 있을 텐데....
우린 그대로 남들은 흔히 갖기 어려운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고 있다. 몇 킬로미터나 이어지는 둑길을 걸으면서 밤이 이슥하도록 함께 돌아다녔다. 늦여름 밤하늘의 은하수는 유난히도 아름다웠고, 논길을 걷노라면 벼이삭에 맺힌 이슬이 달빛에 반사되어 들판 가득히 은구슬을 뿌려 놓은 것만 같았다. 마치 동화 속의 세계 같은 그 속을 거닐며 아내는 곧잘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는 아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여성으로 알았었다. 그러나 내가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나의 주인이 되어 버렸고, 주인으로 군림하는 그녀의 모습은 결코 꿈을 좇던 그때의 처녀 양숙 씨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제일 무서워했던 훈육 주임을 닮았다고나 할까......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1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노무현 답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도스토예프스키.....ㅋㅋㅋㅋㅋ 이 분은 이름만 들어도 고급진 느낌이 풀풀 나죠.ㅋㅋ
아무튼 이 대목에서는 청년 시절 풋풋한 그런 감성이 느껴집니다.. ♥
12.
요즘 가끔 결혼 주례를 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할고 하면 너무 많고 딱 한 마디로 추리려면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이 이야기만 한다.
"너무 큰 기와집을 짓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불안해하지도 마십시오. 20년쯤 지난 선배로서 내게 결혼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냥 '신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16
"그렇다고 불안해하지도 마십시오.".... 와.... 진짜 용기와 감동을 주는 한 구절인 거 같아요 이건...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라는 성서의 한 구절 같은 느낌.. ㅠㅠ
"내게 결혼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냥 '신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크.... 멋진 단어만 갖다 붙여놨네 ㅋㅋㅋ ㅠㅠ
13.
아내는 도대체 내가 하는 일에 끼어들려 하지 않는다. (중략) 청문회 이후 수많은 잡지사에서 아내에게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인터뷰는커녕 사진 한 장도 찍지 못했다.
(중략)
언젠가 이현재 총리 시절이었다. 하루는 아내가 불쑥 "이 총리 그분은 가정 관리를 참 잘하는 것 같아요." 하길래, 무슨 말인가 싶어 왜냐고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이 총리는 부인이나 가족들 이야기가 TV나 신문 잡지에 통 나오질 않아요. 그 부인이 처신을 참 잘하는 것 같아요."
그때 나는 "이 총리도 선거로 뽑히는 자리라면 그럴 수 없을걸."하고 응수를 했지만, 참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무슨 여자가 그리도 고집이 센지.....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18
14.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무렵, 그러니까 아내인 양숙이와 연애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마침 설날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나는 마찬가지로 설을 쇠러 내려온 양숙이와 둑길에서 마주쳤다. 나는 대뜸 말을 건넸다.
"오늘 저녁, 통샘골에서 좀 보재이."
양숙이는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씩 웃기만 하더니 그냥 가버렸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로 나간 나는 30분이 넘도록 오지 않는 양숙이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씩씩대면서 헐레벌떡 양숙이네 집으로 달려간 나는 다짜고짜 집 안으로 들어가 댓돌 밑에 서서 큰 소리로 양숙이를 불렀다.
양숙이의 어머님, 그러니까 지금 나의 장모님께서는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라고 물으셨다. 나는 "안녕하십니까?" 하고 능청을 떨었다.
"니는 와 사람을 기다리게 해 놓고 코빼기도 안 보이노?"
양숙이는 내 신경을 더 거슬렸다가는 자칫하다 동네 망신이 될 것 같아서였는지, 순순히 나를 따라 집 밖으로 나섰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22
노무현식 연애스타일(style) ㅋㅋ
15.
칠거지악.
여자의 시집살이는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여자와 명태는 두들겨야 한다.
새댁은 청치마 밑에서 길을 들여야 한다.
자라나는 동안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들이다. 남성 중심 사회를 상징해 주고 있는 이 말들을 사흘이 멀다 하고 들으면서 자라났던 만큼, 여성을 장식물쯤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음직하다.
(중략)
내 눈에는 형수님이 형님을 일방적으로 구박하고 괴롭히는 것으로만 보였다. 나는 형님을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다짐을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마누라만은 손아귀에 넣고 살겠다고.
그러나 그렇게 다짐에 다짐을 거듭해 왔던 나의 각오는 막상 연애가 시작되면서부터는 봄날 눈 녹듯이 녹아 버리고 말았다. 20대 남녀 사이의 사랑이 가진 위력은 대단했다.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여성에 대한 경계심과 혐오감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그저 양숙이가 좋게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결혼을 할 때까지도 남성 우위의 생각이나 여성에 대한 경계심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양숙이만 '특별히 좋은' 여자이거나 '순종하는' 또는 ' 내 손아귀에 들어올' 여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해 놓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말을 명령조나 억압조로 함부로 하면 그걸 따지고 들뿐만 아니라, 심하면 우리 집의 가풍을 비난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내 개인의 습관까지도 공격의 대상으로 삼곤 했다. 나는 우격다짐을 해서라도 기를 꺾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눈을 부라리기도 했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그러니 작은 말다툼도 걸핏하면 싸움으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나는 별 생각을 다 했다. '아, 속았구나' 싶기도 했고, 나도 잘못하다가는 큰 형님처럼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견딜 수 없는 초조감과 불안감에 나는 급기야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이 되고 말았다.
(중략)
나는 아내가 조금이라도 불평을 하면 소리를 질러 대었고, 그 말에 심하게 반발을 하면 다시 손을 올려붙였던 것이다. 정말 기억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22-125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일반 국민들과 똑같은 마음이었구나... 이런 면에서 친근감이 느껴지는 좋은 사람인 것 같네요 ㅎㅎ
16.
"어떻게 노 형은 형수님을 그렇게 꽉 잡고 삽니까? 비결이 뭡니까?"
나는 그 자리에서 무슨 인생의 대선배나 되는 듯이 대답해 주었다.
"조져야 돼. 밥상 좀 들어 달라고 하면 밥상 엎어 버리고, 이불 개라고 하면 물 젖은 발로 이불을 질겅질겅 밟아 버리는 거야. 그렇게 해야 꽉 잡고 살 수 있는 거야."
물론 농담이었지만, 전혀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것이 나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26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웃기네 ㅋㅋㅋㅋㅋㅋ
17.
그런데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여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아내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달라졌다. '사회 운동'은 나의 다른 모든 생각과 행동들을 바꿔 놓은 것처럼, 여성에 대한 사고방식도 바꾸어 놓았다. 사실 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이다.
83년경, 부산에서 운동권 청년들이 만든 공해 문제 연구소에 내 사무실의 일부를 내주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청년들과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어느 날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에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나는 대뜸 이렇게 농담을 했다.
"그래도 남자한테는 여자가 서너 명은 항상 있어야지. 한 명은 가정용, 또 한 명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뺑뺑이용, 그리고 또 한 명은 인생과 예술을 논하는 오솔길용, 이 정도는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순간 청년들의 얼굴 색이 갑자기 변해 버렸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26
갑분싸...ㅋㅋ
18.
장성한 자녀들을 둔 어머니들 몇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단다. 모두들 손주 키워 주기가 싫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에 어떤 어머니가 "손주 맡기면 사위나 며느리 앞에서 아이 입을 걸레로 싹 닦아주고, 음식을 입에 씹어서 먹이면 그 날로 아이를 데려간다."라고 손주 보아주지 않을 수 있는 비방을 가르쳐 주더란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그러나 웃을 일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 대책을 세워야 한다. 나는 여성들이 좀 더 넓게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 좀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29
아...ㅋㅋㅋㅋㅋㅋㅋ 웃긴 일화들이 이 책에 많이 있네..ㅋㅋㅋ
19.
나는 아이들 문제로는 처음으로 비상이 걸렸다. 가고 싶은 학과에 실력 때문에 갈 수 없을 것 같아 고민하는 큰 놈을 붙잡고 달랬다.
"건호야, 대학교에서 전공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대학 졸업 후 전공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은 다섯 중에 하나도 안된단다. 하물며 우리나라처럼 성적에 맞추어 대학과 학과를 선택하는 경우에는 더 말해 무엇하겠냐. 어느 학과를 나와도 나중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또 이렇게 달래기도 했다.
"대학에 가는 목적은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전문 연구가가 되기 위해서 대학을 가고, 어떤 사람은 취직 자리를 얻으려고 대학에 가기도 하지만, 훌륭한 시민의 소양을 쌓기 위해서 대학에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시민으로서의 소양을 쌓기 위해 대학에 간다 생각하면 학과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다른 공부를 하고 싶으면 네 나이 40살까지는 내가 책임지마. 그래야 할 형편이면 내가 정치를 그만두고라도 돈을 벌어 너를 밀어 줄 테다."
(중략)
그런데 대학에 가서도 역시 문제가 생겼다. 내가 대학을 교양 과정으로만 생각하고 친구 잘 사귀고 책이나 많이 읽어 인생을 폭넓게 배우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학과 공부는 하기가 싫고 신경은 쓰여서 매우 고통스러운 모양이다.
나는 큰 놈의 일을 통해서 교육은 부모가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보통 사람들은 혼자서 세상 돌아가는 흐름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 스스로의 깨달음과 선택이 아니라, 부모의 권유인 경우에는 더욱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지금 나더러 아이를 다시 키우라면 망설이지 않고 아이를 경쟁의 대열로 밀어 넣을 것이다. 세상이 잘못되어 있을 때는 그 잘못된 구조와 제도 자체를 고치도록 노력해야지 혼자서 이탈하거나 외면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33-135
결국 후회한다는 소리네... 대학 잘 보내야겠다는 거에 동의하는 거고.. ㅋㅋ
그래도 위로할 때는 노무현 대통령이 아들에게 해준 말이 좋은 것 같다.
20.
아내는 아이들 양육에 관하여 자기 공치사나 하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구박이지만 사실 나는 큰 몫을 하고 있다. 꼭 공부해라, 운동해라, 나쁜 짓 하지 마라, 그 버릇 고쳐라, 닦달질해야 아이들 교육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나처럼 가만히 있어도 큰 일 하는 수도 있다.
나는 아이들로부터 존경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수치감을 준 일도 없다. 아이들은 나를 잘 이해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조금 모자라는 듯한 아버지를 보고 걱정해줄 줄 아는 재미도 있다.
아이들이 존경하는 아버지, 그것보다 더 좋은 교육이 있을까? 왜 존경하는가,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내 인생 전부를 다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 인격 전부를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냥 그렇다. 다만 나는 나 때문에 아이들을 수치스럽게 만든 일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나 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39
이 말을 듣고 생각나는 스카이캐슬의 한 장면이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리 : 내가 왜 실패한 인생이야, 아빠야 말로 실패한 인생이야!
"자식한테 존경받는 부모가 성공한 인생"이라는데.. 야 준준. 너네 아빠 존경해?
기준 : 존경? 킄. 할 수만 있다면 해봤음 좋겠다.
서준 : 나도 하고 싶다..존경..
세리 : 봤지 아빠? 실패작은 내가 아니라 아빠야, 아빠라고. 아빠야 말로 젤 불쌍해.
아빠는 철저하게 실패했어. 바닥이야, 빵점이야!
아빠 : 입 다물지 못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렇다. 자식들이 아버지를 존경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버지의 가장 큰 교육적 역할이다.
21.
나는 가끔 강연을 가면 이런 농담을 하곤 한다.
"여러분! 여러분은 정치인이 깨끗하기를 바랍니까? 열심히 일하기를 바랍니까? 겸손하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돈도 탐내면 안 되고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고 목에 힘도 주면 안 되겠네요?"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모두들 "예."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누가 정치하려고 하겠습니까? 무슨 재미로 정치를 하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정치하겠습니까?"
사람들은 갑자기 어리둥절해진다. 그리고 나는 그 쯤해서 말머리를 돌린다.
"여러분 그래도 정치하려는 사람은 항상 넘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정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복잡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칭찬받는 재미라도 있어야지요. 박수나 한 번 크게 쳐주십시오."
얼마 전부터 신부와 정치인이 함께 한강에 빠져 있으면 정치인을 먼저 건져낸다는 농담이 유행하고 있다. 정치인이 빠져 죽으면 한강물이 오염되기 때문이란다. 웃기느라 하는 소리라 따라 웃으면서도 마음은 따라 웃을 수가 없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44
정치인이 빠져 죽으면 한강물이 오염된다...ㅋㅋㅋㅋ 진짜 웃기는 말이다 ㅋㅋㅋㅋ
22.
그 일 말고도 어린 시절의 부끄러웠던 기억이 하나 더 있다. 국민학교 5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다들 보자기에 책을 싸 들고 다니거나 퍼런 돗베로 만든 가방을 들고 다녔다. 가끔 고무에 헝겊을 댄 가방도 있었는데 읍내의 부잣집 아이들이나 간혹 가지고 다니는 고급 가방이었다.
어느 날 체육 시간에 당번이 되어 친구와 둘이서 교실을 지키다가 그렇게 생긴 새 가방을 하나 발견했다. 둘이서 가방을 뒤적여 보다가 그만 면도칼로 가방을 죽 찢어 버렸다. 무슨 심술이었는지 모르겠다.
체육 시간이 끝나자 교실은 곧 발칵 뒤집혔다. 담임 선생님은 몽둥이를 들고 범인을 찾으려 했지만 나는 끝내 자백을 않고 버텨 넘어갔다. 그 일을 생각하면 본래 내가 모범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일 말고도 거짓말을 했거나 훔친 일이 몇 번 더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내가 변호사가 되어 노동자들의 변론을 도와주던 시절, 문득 그 일이 떠오른 적이 있었다.
어쩌다 노동운동에 뛰어든 어느 여학생과 한참 사회주의에 대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 여학생은 사회주의가 옳다고 나를 설득하려 했고, 나는 사회주의가 잘 안 될 거라고 얘기를 했다. 한참 논쟁 중에 문득 어린 시절 내가 반 친구의 가방을 찢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남이 좋은 걸 가지고 있으면 샘을 내는 마음이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여학생에겐 어린 시절의 그 얘끼를 꺼내진 않았지만 속으론 그렇게 생각했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건설된다는데, 인간의 본성에 자리 잡은 그런 욕심들이 과연 이성으로 다스려질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나만 가난했던 것은 아닌데도 어린 시절의 나는 유독 가난을 심각하게 여기며 자라났다. 그리고 그 상처는 나의 잠재의식 속에 어떻게 해서라도 나만은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열망과 함께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동시에 심어졌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상반된 이 두 가지 생각이야말로 지금까지 지칠 줄 모르며 나의 삶을 오늘날까지 몰고 온 내 마음속의 풍차였는지도 모르지만....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71-172
노 대통령도 어렸을 땐 심술꾸러기였었구나..ㅋㅋ
정말 남이 좋은 걸 가지고 있으면 샘을 내는 게 인간의 본성인 것 맞는 듯하다. 그게 옳지 않은 건 알지만... 본성이 그런데 어떡하겠는가..ㅎㅎ 그래도 그런 심보가 심한 사람들은 멀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23.
다음날 어머니와 둘이서 진영 중학교의 교감 선생님을 찾아갔다. 우선 책값만 내고 여름 복숭아 농사지어서 입학금을 낼 테니 입학시켜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교감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매달려 통사정을 해도 교감은 막무가내였다. 나 보고는 공부할 필요 없으니 농사나 배우라고 했다. "그럼 교감 선생님 아들은 왜 공부시킵니까?"하고 따져도 봤지만 교감은 끄떡도 안 했다. 나중에는 실업자인 큰 형님의 얘기까지 튀어나왔다. 당신 큰아들 대학 나와도 저렇게 백수건달 아니냐, 그러니 공부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얼마나 서럽고 분했던지 교감 앞에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들을 입학시키고 싶어 차마 대들진 못하고 어머니는 계속 울며 매달렸다.
옆에서 지켜보다 못한 내가 입학 원서를 북북 찢어 버렸다. "어머니, 집에 갑시다. 나 이 학교 안 다녀도 좋소!" 하고는 뛰쳐나와 버렸다. 그러자 교감은 "저 봐라. 저런 놈 공부시켜 봐야 깡패밖에 안된다."며 의기양양해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고 교감 선생에게 계속 매달렸다. 내가 다시 들어가 어머니의 팔을 끌고 나오며 한 마디 외쳤다. "가요! 씨팔, 이 학교 아니면 학교 없나!"
집에 돌아오자 난리가 났다. 사정을 안 후 제일 난처해진 사람이 큰 형님이었다. 그러나 역시 큰 형님은 큰형님이었다.
다음 날 학교를 찾아간 큰형님은 교감의 멱살을 잡고 한바탕 난리를 벌였다. '공부해 봐야 깡패 된다'는 비교육적 언사를 문제 삼겠다고 협박하자 오히려 교감이 싹싹 빌었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73-174
"가요! 씨팔, 이 학교 아니면 학교 없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음성 지원되네 ㅋㅋㅋㅋㅋ
노 대통령도 어렸을 땐 이런 산전수전 다 겪었군요 ㅋㅋㅋ
큰 형님은 근데 진짜로 백수건달이 맞았던 모양이네? 멱살을 잡았다고? ㄷㄷ
(큰 형님은 젊은 시절 돌아가셨고, 작은 형님은 그 유명한 노건평입니다.)
24.
당시 부산 상고에는 시골 출신들이 많았다.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데다 졸업 후 은행에 취직할 수 있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열심히 공부했다.
1학년을 그럭저럭 보낸 후 2학년이 되면서 난 '농땡이'를 치기 시작했다. 머리를 안 깎이려 시험 시간에 도망을 치기도 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과 담배를 배우기도 했다. 성적은 중간도 안 되는 수준까지 떨어져 갔다. 한 마디로 고등학교 시절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중략)
마음속으로는 큰 형님을 많이 원망했다. 부모님의 그런 모습이 너무나 딱하게 여겨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그즈음 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고향에서 다닐 수 있는 직장에 내가 취직을 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농협이었다.
농땡이가 뒤늦게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도별로 한 명씩 뽑는 시험에서 나는 떨어지고 말았다.
졸업 때가 되자 학교에서 직장을 알선해 주었다.'삼해 공업'이라는 어망 회사였다. 나를 포험해 졸업생 네 명이 그 회사를 다니게 되었는데 아직 졸업 전이라 우린 모두 교복을 입고 근무를 했다.
(중략)
한 달 후쯤 드디어 첫 월급이 나왔다. 그런데 겨우 2천7백 원, 아무리 실습 기간이라지만 한 달 하숙비도 안 되는 돈이었다. 함께 입사한 친구들 네 명이 모여서 그만두자고 의논을 했다. 사장을 찾아가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금세 4천 원으로 올려 주겠다고 했다. 결국 두 명은 그대로 남고 나와 다른 한 친구는 그만두고 나와버렸다. 고향에 내려가 고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작정했다.
한 달 반 치의 월급 6천 원을 받아 뭘 할까 고민을 했다. 옷을 살까 구두를 살까 망설이다가 결국 기타 한 대 사고, 고시 공부용 헌 책 몇 권, 나머진 술 마시고 영화 보는 데 모두 써 버렸다. 그리곤 내 고향 진영으로 내려갔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78-180
농땡이 노무현!
첫 월급 받아서 기타 한 대 사고, 술 마시고 영화만 본 노무현! (고시 공부 책 몇 권 사고)ㅋㅋ
이때 기타로 상록수 연습하고 대선 CF 찍었나?
25.
그때 울산에는 서생 배 밭이 있었는데, 거기서 배 도둑질도 해 먹고 닭서리도 해 먹었다. 돈도 못 벌면서 그렇게 어울려 다니기만 한 것 같다. 그러다 하루는 공사장에서 큰 못에 발을 찔려 더 이상 품도 팔 수 없게 돼 버렸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자니 밥 값이 2천 원 이상이나 밀려 있었다. 도망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일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곤 식당 주인 몰래 울산 역으로 내달렸다. 그때 울산 역 플랫폼에서 얼마나 뒤통수가 당기고 또한 서럽던지....
집에 돌아와 발이 다 나으면서 나는 다시 작은형님과 돈 벌 궁리를 했다. 김해 농업 시험장에 들어가 감나무 묘목을 훔쳐 왔다. 우리 산에다 과수원을 만듭답시고 밤중에 몰래 들어가 1백 포기 정도를 뽑아 왔던 것이다. 사실 그때 심은 묘목이 뒷날 우리 집의 어려운 살림에 제법 보탬이 되기도 했다.
그때 훔친 묘목을 신문지에 싸 들고 왔는데, 집에 와서 신문지를 펴놓고 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사법 및 행정 요원 예비 시험'이 있다는 공고가 그 신문에 실린 것이다.
부랴부랴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그 해 11월 부산에서 시험을 봤다. 10개 과목의 시험을 봤는데 그럭저럭 잘 본 것 같았다.
시험을 보고 온 그 다음날 다시 울산으로 갔다. 한가하게 시험 결과만 기다리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달리 아는 데도 없고 해서 밥 값 떼먹고 도망쳤던 그 합숙소로 다시 찾아갔다. 의외로 주인은 잘 돌아왔다면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중략)
그러나 그 뒤 제도가 바뀌어 예비 시험 합격이 아무 쓸모가 없게 돼 버렸다. 고시 응시에 학력 제한이 철폐되었기 때문이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82-183
훔치는 게 일상인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작은 형 노건평..
혹시 박연차 게이트 때도...? ㄷㄷ
26.
병원에 며칠 있다 보니 내게 한 가지 난처한 문제가 생겼다. 병원에는 예쁘장한 처녀들이 간호보조원으로 있었는데 그들에게 내 행색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공사판에서 일할 때나 합숙소에서 뒹굴 때는 몰랐는데 시내 병원에 나와 보니 내 옷이 너무나 남루했다.
내 딴에는 고등학교도 나오고 고시 예비고사에도 합격해 맘속으로는 꽤나 잘난 맛에 빠져 있었는데, 그럴수록 내 남루한 옷에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며칠 후 어머니가 갖다 준 옷으로 겨우 거지꼴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간호보조원들에게 자꾸 마음이 쏠렸다. 별 일이 없으면서도 나가서는 은근히 그녀들과 마주치길 기대하며 주위를 얼쩡거렸다.
그러나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들은 도대체 내게 관심을 보이기는커녕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상심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울산의 국세청에 다니던 친구와 대학을 다니던 친구가 면회를 와서는 며칠간 같이 놀아 주곤 돌아갔다. 그러자 나에 대한 그 처녀들의 대우가 확 달라져 버렸다. 반갑게 인사도 받아 주고 내 입원실의 청소까지 해 주었다.
나는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중 한 아가씨가 내게 오더니 대학 다니는 내 친구의 주소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김이 팍 새는 순간이었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84-185
풋풋했던 젊었을 적 그 감성..ㅋㅋ
27.
한편 그때의 '노가다' 생활을 돌이켜보면 환경에 따라서 사람이 얼마나 파렴치해지고 거칠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 함바(합숙소)에 딱 들어가면 마치 감방에서와 같이 텃세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 먼저 온 고참이나 힘깨나 쓴다는 친구들이 공연히 시비를 걸어온다. 자기 자리로 오라고 하고선 몇 살이냐 뭐하다 왔느냐 등의 질문으로 불편하게 해 놓고선, 그런 기색이 보이면 아니꼬우냐로부터 시작해 시비를 거는 것이다. 맨날 모였다 하면 화투요, 입만 열었다 하면 욕이다. 옛날 누굴 두들겨 팬 이야기, 여자 겁탈한 이야기, 일 저지르고 도망친 일 등등..... 모여 앉아 궁리하는 거라고는 어떻게 하면 공사장의 모터나 철근, 자재 같은 걸 빼내 나가 팔아먹을까 하는 것들이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86
진짜 친구를 잘 만나야 하는 듯..ㅋㅋㅋ
이런 분들이 지금의 노조???
28.
한 번은 일터로 나가는 길에 지나가는 아주머니들에게 음담패설로 희롱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아주머니들도 호락호락하지가 않아 욕만 됫박으로 얻어먹고 코가 납작해져 버린 일이 있었다. 분풀이할 궁리 끝에 다음 날 아주머니들이 지나가고 있는 길거리를 향해 나란히 줄지어 서서는 바지춤을 내렸다. 그리곤 단체로 오줌을 갈겨댔다. 밥 먹고 생각하는 거라곤 그런 것뿐이었다.
그 뒤 군대를 갔는데 군복을 입혀 놓으니 또 그 지경이고, 제대 후 예비군복을 입혀 놓아도 마찬가지였다. 의사건 변호사건 예비군 훈련장에만 가면 어떻게 농땡이를 부릴까 궁리만 한다. 아무 길거리에서나 오줌을 누고, 끝나면 그냥 집에 가도 될 걸 술집에 몰려가 한 잔씩 해야만 하고, 그러다 지나가는 여자나 희롱하고.....
옷과 환경이 사람을 지배하는 모양이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86-187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노무현 바바리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저건 진짜 웃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군인들 지나가는 여자 희롱하는 거 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 뭐냐 노홍철은 군인 시절에 보초 서다가 지나가는 여자들한테 "움직이면 쏜다!"하고 전번 땄다는 이야기도 있던데..ㅋ
29.
내가 영장 당직을 서던 날이었다. 어느 회사원이 찾아왔는데 자기 동료가 절도 혐의로 영장이 신청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동료는 결코 남의 물건 훔칠 사람이 아니며 성실한 사람이니 선처를 바란다고 하소연을 하고 돌아갔다. 그러자 마침 옆에 있던 판사가 대뜸 욕을 해대는 것이었다.
"저 새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겁 없이 와서 헛소리하고 있어. 저런 놈은 따끔한 맛 좀 보여줘야 돼."
처음 이야기를 들을 때는 기록을 자세히 보아야겠구나 생각했는데, 그 얘기를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깊은 기분이 들어 그만 영장을 발부하고 말았다. 지나 생각해 보니 그때 이미 내가 권위 의식에 물들어 있었던가 보다 싶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92
판사들 이런 식으로 영장 발부합니까?..ㅋㅋ 기분파들!!
당시 노무현은 판사였습니다. 원래는 변호사만 하려고 했다가 장인어른이 좌익사상범이었던 것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고 어머니가 오해를 하실 것 같아 2년 동안만 판사를 했다고 합니다.
30.
<과정도 하나의 직업이었다>
1. 머리에
지나간 일은 언제나 아름답게만 보인 다지요? 산꼭대기에서는 힘겹게 올라온 가파른 산길마저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듯이 말입니다. 또 승자의 과거는 그것이 자서전이든 타인의 작품이든 가끔 신화적으로 수식되어 있음을 봅니다.
사법시험의 합격, 이것이 긴 여정에서 하나의 중간 목적지에 불과하지만 하나의 성취와 조그마한 승리로 평가될 수도 있기에, 막상 합격기라는 것을 쓰려하니 자칫 어떤 승리감에 도취되거나 과거를 돌아보는 낭만적인 기분에 도취되어 힘겹고 괴로웠던 긴 수험 과정의 체험을 스스로 미화시켜 얘기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까 여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졸 합격자라는 다소 특이한 제 입장이 독학도들에게 어떤 관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둔한 솜씨나마 될 수 이는 한 사실대로 기억을 더듬고 그때의 생생한 감정들을 살려서 몇 자 쓰고자 합니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195-196
이 글은 노 전 대통령이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당시에 합격수기로 썼던 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문장 하나하나가 굉장히 기갈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과정도 하나의 직업이었다.... 크.... 산꼭대기에서는 힘겹게 올라온 가파른 산길마저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크....
31.
6. 더하고 싶은 이야기
(중략)
4) 연애와 결혼
처음 8개월에 걸친 일방적 구애 작전은 시간과 정력의 손실이 너무나 컸다. 그러나 일단 결혼한 후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아내의 세심한 배려는 말할 것도 없고 점심을 가지고 올 때면 언제나 따라오는 개구쟁이 신걸이의 재롱은 식사시간을 즐겁게 해 주었다. 붉은 낙조를 바라보며 집에 건너오면 또 반겨 주는 신걸이의 고사리 손이 하루의 긴장과 피로를 깨끗이 잊게 해 주어, 나는 침체기를 몰랐고 따로 휴식이나 기분 전환 거리가 필요 없었다.
애타는 애인들 있으면 결혼들 합시다.
5) 건강
절대적 조건임은 두말할 것도 없고 다만 공부로 오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보다 초조, 불안 등의 심리적 파탄에서 오는 손실이 훨씬 더 심각하고 장기적인 것이다. '고시 아니면 파멸'이라는 생각이나 출세에의 지나친 집착, '최단기' '수석 합격' 등의 욕심은 사람을 견딜 수 없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하나의 직업인이 성실하게 직장에 임하듯 수험 생활에 임했더니 장기에 걸쳐 장소를 옮기지도 않고 공백 기간도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바꾸고도 곧잘 대성하더라. 일정시까지 안되면 직업을 바꾸면 그만이다. 여하튼 다소간의 긴장은 필요하겠으나 지나친 긴장 불안 초조는 금물이다.
또 며칠을 허송했다 하여 갑자기 초조해지고 그를 보상하겠다고 급하게 열을 올리고 무리를 하는 것은 잇달아서 또다시 며칠의 침체와 시간의 낭비를 강요하는 결과가 되기 십상이다. 지나간 시간은 아무리 아까워도 깨끗이 잊는 것이 좋다. 장기전에서의 며칠의 허송은 그리 문제 되지 않는다. 나는 최종 정리 기간에도 부부 관계는 억지로 금욕하지는 않았다.
여하튼 나는 이런 느슨한 자세로 공부했다. 그러나 결코 남보다 노력을 덜하지는 않았다. 보통 10시간은 넘게 공부했고 일단 책상에 앉으면 무서운 집중력을 구사했다. 머리가 혼란해지고 잡념이 생길 때에는 책을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일단 책으로 떠나면 고시는 깨끗이 잊었다. 이런 느슨하면서도 투철한 자세는 확고한 직업관에서 왔다고 생각되지만, 또 합격에의 신념으로 보완될 때 더욱 안정적이라 생각된다.
-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좀 도와줘』(1993) (노무현) 中 - p.204-207
*낙조(떨어질落비출照) : 저녁에 지는 햇빛
애타는 애인들 있으면 결혼들 합시다... ㅋㅋㅋㅋㅋ 하.... 진짜 ㅋㅋㅋㅋ
최종 정리 기간에도 부부관계는 억지로 금욕하지 않았다.... 핰ㅋㅋㅋ 노무현답네요 진짜 ㅋㅋㅋㅋㅋㅋ
그래도 휴식을 독서로 하는... 머리 좋은 학생은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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